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을 맺은 지 40년이 흘렀다. 이를 기념하여 양국은 2005년을 한일 우정의해로 선포해 지난 2월 17일부터 20일까지 '2005 한일공동방문의 해'를 여는 '한일교류대축제' 개최했다. 이번 해에는 여느 해 보다 많은 한일 문화교류가 준비 돼 있다. 2002년부터 일본 큐슈 호쿠오카 대학에서 재학 중인 장연주 씨와 본교에서
이창민인문대 교수 현대문학 <고대신문>이 오늘자로 1500호를 낸다고 한다. 참으로 축하할 일이다. 1947년에 창간호를 냈으니 이번 호를 내기까지 58년이 걸렸다. 주나 연을 단위로 삼는 일에서 수리적 연산의 차원이 아니라면 1500이나 58은 둘 다 엄청나게 큰 수다. 체험할 수 있는 실제의 수준에서 보면, 두 수는 경험의 극한에 가깝다. 대
"겨울연가 욘사마, 비, 보아 일본열도 강타"모든 방송매체들은 뜨겁게 ‘한류(韓流)’를 다루고 있다. 과연 일본 대학생들도 이처럼 한류열풍을 실감하고 있을까? 문화관광부 산하에 있는 문화산업교류재단 기획홍보팀 최기영 과장은 “한국 영화와 드라마는 일본에 한국문화를 알리는 기폭제로 작용했다. 월드컵으로 인한 긍정적인 이미지와 드라마가 만나 한류열풍을 만들었다
“…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김구선생이 백범일지 중 ‘나의 소원’에 명시한 내용이다. 각 민족이 역사에 뿌리를 두고 이룩해 온 문화유산의
중요무형문화재는 어떤 과정을 통해 지정되는 것일까?이에 대한 답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알아둘 것은 ‘중요무형문화재’의 정확한 의미이다.무형문화재 중 보호를 시급하게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은 공식적으로 지정돼 있지 않다. 예를 들어 ‘부채춤’은 비지정 무형문화재이다. 이것은 전승하고 있는 사람이 많아 아직 보호가 필요한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정된 무형문화
지난 18일, 서울시 인사동 쌈지공예골목건물(쌈지길) 3층에 ‘서울무형문화재 작품전시장’(이하 전시장)이 개관했다. 서울시의 지원을 통해 문을 열게 된 전시장에서는 서울시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들의 작품 전시 및 판매가 이뤄지고 있다. 이로써 그동안 마련되지 못했던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들을 위한 상설전시장이 열린 것이다. 이전에 서울시에서 무형문화재 기능보유
무형문화재 보호의 기본 정신은 민족의 정신적 재산을 우리 민족이 함께 향유하고 보존해 후손에게 온전히 물려줘 계승, 발전하는데 있다. 무형문화재는 유형문화재와 달리 일정한 형태를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기능을 보유하고 있는 자가 실현을 할 때에 비로소 문화재로서 가치를 느끼고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무형문화재를 보호한다는 것은 전통적인 기능
△ 언제 처음 춤에 관심을 갖게 됐는가. 특별한 계기가 있었는가.- 어렸을 적에 동네에서 굿이 많이 행해졌다. 경기도지역의 도당굿이었는데 그것에 심취해 구경을 하다 밤새 집에서 따라해 보며 춤과 인연을 맺게 됐다. 옹기를 굽는 집안에서 자라 어릴 때부터 예술을 접해왔던 영향도 크다.△ 춤을 배워온 과정을 설명해 달라. - 본격적으로 춤을 배우기 시작한 것은
지난 설에 고향에 내려가 초등학교 동창들과 오랜만에 자리를 같이 했다. 간간히 연락들은 한 다리 건너는 식으로 주고 받아 왔지만 한창 바쁘게 일할 나이들인지라 이런 저런 사는 이야기로 긴밤이 짧기만 했다. 고단한 직장 이야기, 자식 키우는 재미 등의 이야기가 오고가다 초등학교 시절 추억들이 쏟아져 나왔다. 자전거를 타고 무전여행 가리라 맘먹고 출발했다가 한
△현재 보유하고 있는 기술은 무엇인가- 가야금, 거문고, 아쟁, 해금 등 우리나라의 전통 현악기를 만드는 기능이다. 현악기를 만들고, 후에 연주자가 다시 현악기를 가지고 오면 조율해주기도 한다.△이 기술을 익히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어렸을 적 전주에서 살 때, 옆집에 현악기를 만드시던 선생님이 계셔서 자주 그 집에 놀러가 악기를 만드는 과정을 지켜보곤 했
구인규서창 총학생회장학내에서 학보는 학우들의 눈과 귀의 역할을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언론의 힘과 역할을 더욱 높아져가고, 특히 자유와 정의 진리를 구현해야 하는 대학에서 학보라는 언론의 역할은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고대신문이 1500회라는 발간 횟수를 맞으며 그동안 우리 학우들의 눈과 귀의 역할을 해준 것에 대한 고마움과 함께 1
김미혜동인회장, 한양대교수 1967년 2학년이었던 나는 당시 편집국장이던 오탁번 선배의 ‘꼬임’에 빠져 특채로 고대신문사 기자가 되었다. 난 연극배우가 되고 싶어 입학하자 곧 고대극회에 들어갔지만 그 마음은 멀리 하고 원고청탁, 기사쓰기, 문화면에 실을 글쓰기에 바빴다. 성적은 세 과목이 낙제 - 집안에서는 족보에 없는 성적이라며 신문사를 그만두라는 압력이
곽승준 고대신문 편집인 겸 주간 해방이후 본교가 대학교로서 기틀을 갖추기 시작할 무렵부터 안암동산에서 고대의 영욕을 증명해 온 고대신문이 지령 1500호를 맞았습니다. 이렇게 기쁜 날 고대신문의 막중한 책임을 맡았다는 것이 개인적으로 큰 영광이자, 개교 100주년인 2005년을 알리는 눈부신 신호탄이라 여겨집니다. 고대신문은 고려대학교를 대표하는 신문으로서
어 윤 대 고려대학교 총장 고대신문이 지령 1500호를 맞이한것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축하합니다. 고대신문은 학교의 지원 없이 순수하게 학생들의 노력만으로 1947년 11월 3일 창간된 우리나라 최초의 대학신문입니다. 지난 58년 동안 매주 한번씩 찍어내는 주간 단위의 발행 시스템을 지속해왔으니 지금은 지령이 58년의 역사에 매년 52주를 곱한 3016호가
저는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서 학부를 마치고 현재 대학원과정에 있는 학생입니다. 교수님을 직접 뵙지는 못했습니다만 금번 교수님의 기고문과 관련하여 저의 생각을 밝히고자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무례함보다는 한 학생의 이견으로 읽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일제시대에 관한 교수님의 주장은 다음의 세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러시아에 병합되었
본지 2003년 7월 25일자에서 ‘서창 계절학기 교류안돼’라는 기사가 보도됐다. ‘서창캠퍼스(이하 서창)의 계절학기가 안암캠퍼스(이하 안암)를 비롯한 타 대학간에 교류가 되지 않아 서창 학생들의 불만이 높아지고 있다’ 는 내용이었다. 2003년에는 이중전공이수 허가자중 이중전공 이수에 필수과목인 경우에 한해 서창 학생들이 안암에서 수강이 허용됐다. 그러나
‘건의사항의 해결사’ 독자투고에 실렸던 학생들의 글이 현실에 많이 반영되고 있다.우선 지난해 4월 12일에 실렸던 '홍보관 여자화장실 문 안 고친 채 방치 한달'이 나간 후, 홍보관 2층 여자 화장실의 문이 학교 측의 시설보수로 모두 고쳐졌다. 당시 화장실 문이 고장난 채 방치돼 여학생들이 화장실 이용에 불편을 겪었지만 보도 이후로 안심하고 화장실을 이용할
강의평가제본지 1999년 1월 1일자 해설보도 면에서는 강의평가제에 대한 문제점을 보도했다. △강의의 특성을 무시하고 모든 강의를 똑같은 문항으로 평가하는 문제 △종강 시간에 교수가 강의평가서를 직접 수거하는 방식으로 인한 여러 부작용 △평가 결과를 공개하지 않는 점 △학생들의 무성의한 답변으로 신뢰도가 저하된다는 점 등이 주요내용이었다. 1994년도 1학
정진규(시인 국문학과· 58학번)나는 아직도 그 때를 잊지 못한다중앙도서관으로 오르는 비탈길 입구강의보다 진종일 책읽기에 빠졌던그곳은 내 영혼의 入口이기도 했는데봄날 같은 때면그곳 자목련 그늘 아래서 내가 펼쳐들던수요일이던가 한 번씩 내가 깊게 맡았던고대신문의 싱싱한 잉크 냄새그걸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그러고 서 있던 그날의 내 모습은지금도 내 가슴 속
본지 1999년 1월 1일자 해설보도 면에서는 강의평가제에 대한 문제점을 보도했다. △강의의 특성을 무시하고 모든 강의를 똑같은 문항으로 평가하는 문제 △종강 시간에 교수가 강의평가서를 직접 수거하는 방식으로 인한 여러 부작용 △평가 결과를 공개하지 않는 점 △학생들의 무성의한 답변으로 신뢰도가 저하된다는 점 등이 주요내용이었다. 1994년도 1학기부터 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