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민제 전문기자
“언제 대한민국이 준비해 놓고 제대로 한 일이 있나요? 우리는 해 놓고 봤다고. 우리는 그것밖에 길이 없는 나라야.” 을 보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이상하게 전두환도 노태우도 아닌 ‘5공 실세’ 허화평의 회고였다. 성공적인 대회 결과와는 별개로, 올림픽 유치 원동력에는 비민주적으로 집권한 5공의 여론 전환과 체제 경쟁의 승리라는 프로파간다적 목적이 존재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당장의 기회를 잡는 게 나라를 위하는 길이다. 꽤 적극적으로 이뤄진 88 올림픽을 유치한 정권의 생각을 짐작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지도
필자가 무슨 말을 하면 “너 T지?”라는 핀잔을 자주 듣는다. 타인과의 관계를 감정(Feeling)으로 이해하기보다 이성적으로 사고(Thinking)하는 냉정한 성향이라는 비판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성향에 대한 분류는 몇 년 전부터 대중적 인기를 얻은 MBTI 유형을 기반으로 한다. MBTI란 개발자인 마이어스와 브릭스(Meyers-Briggs) 그리고 유형 지표(Type Indicator)의 앞 글자를 따서 만들어진 말이다. 많은 사람이 MBTI로 직업이나 연애 궁합 등을 예측해 보기도 하는데 학계에서는 MBTI의
우리는 관습적으로 일본의 국가폭력에 사과를 요구한다. 그리고 손쉽게 한국의 국가폭력에 대해 침묵한다. 한국은 일본을 너무도 존경한 나머지 화려한 근대화 과정만이 아니라 전쟁 범죄마저 답습했다. 일본 정부의 대쪽 같은 피해자 외면은 한국 정부에게 훌륭한 교과서가 됐다. 모방으론 만족하지 못했는지 이젠 한술 더 떠 피해자와 증인을 조롱하고 모욕한다. 1968년 2월, 베트남 꽝남성 퐁니·퐁녓 마을. 한국 해병대는 무고한 주민들에게 총부리를 겨눴다. 원거리 포격과 자동화기 앞에서 어린아이도, 임산부도 예외는 아니었다. 8살이었던 응우옌티
올해는 유독 연예인의 열애 기사가 많이 보인다. 연초나 연말에 한두 개 나올 법한 열애설들이 한 주에 한 번씩은 나오는 듯하다. 그럴 때면 또 어디서 연예계 스캔들로 덮어야 할 사건 사고가 터진 건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든다. 200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연예인의 연애 사실은 기자회견을 할 정도로 중대한 사건이었다. 2001년 보이그룹 ‘god’의 멤버 박준형이 배우 한고은과의 열애 사실을 인정한 후 소속사가 곧바로 박준형의 퇴출을 결정한 사건이 있다. god는 당시 잘 나가던 아이돌이었고 연애에 엄격했던 사회 통념상 그의 열애설은
2014년 4월 16일, 대구 어느 국밥집에서 늦은 점심을 해결하던 사람들에게 TV에서 속보가 전해졌다. 진도 부근에서 배가 가라앉고 있다고. 국에 밥을 말아 술술 넘기던 밥알이 목구멍에 콱 막혔다. 배는 수학여행을 가던 학생들을 태우고 있었다. 2003년 2월 18일 대학교 입학을 앞둔 열아홉 살 딸이 지하철 화재로 죽은 후 ‘대구 지하철 참사 유가족’이 된 황명애님은 아득해지는 정신을 붙잡고 다른 유가족들과 팽목항으로 갔다. 대구 지하철 참사 유가족들은 “우리가 상주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해 이런 참사가 또 발생했습니다. 미안합
○···얼마 전 세종에 사는 한 호형에게서 전화가 왔소. “제보를 받아줄 수 있느냐”면서 말이오. 이곳저곳 수소문해 보니 문제의 근원은 세종부총학생회장인 듯 보이오. 행방이 묘연해진 그에 관한 풍문은 퍽 무성하오. “어느 행사 전날 부총학생회장이 돌연 불참을 예고하고는 사라져 버렸소!” 부디 근황을 알려주시오. 도통 소식이 없으니 내분이 일어난 줄 아는 호형도 있소. 님께서 침묵으로 일관하신다면, 호형들은 그것을 태업으로 받아들일 것이오. ○···호형들, 최근 학교가 준비하고 있는 게 많소. 낡은 건물을 고치거나 아예 새로 짓는 일
지난달 26일 정부는 국무회의에서 ‘2025년도 예산안 편성 및 기금운용계획안 작성 지침’을 의결했다. 정부 예산 재량지출을 10% 이상 감축하는 것이 골자다. 아낀 예산은 R&D 투자 확대, 저출산 대책 마련, 필수·지역의료 확충 등에 쓰일 계획이다. 기획재정부는 예산안에 대해 “건전재정 기조를 확립해 미래 세대의 부담을 최소화하겠다”고 밝혔다. 불필요한 사업을 줄이고 재정을 건전화하겠다는 정부의 선택은 당연해 보인다. 문재인 정부는 5년 내내 예산을 확대하며 30%대에 머물던 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을 2022년 49.4%까지
빈 답안지와 원고지, 자기소개서 등 채워나가야 하는 여백들은 항상 나를 숨 막히게 했다. 강의가 지루할 때 빈 연습장 한쪽에 재미로 그린 만화 주인공이나, 빈 편지지에 좋아하던 친구의 생일을 축하하는 글을 써 내려갈 때는 오히려 빈칸이 더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기소개서나 과제, 포트폴리오 같은 것들은 합격과 탈락, 정답과 오답,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있다. 지양해야 하는 표현과 지향해야 하는 표현을 고심해 단어와 접속사, 조사를 조합하다 보면 한 글자를 쓰는 것이 더 무겁게 느껴졌다. 미혼이라는 내 상태도 그렇다.
고대에서 ‘선생님’이 된 지 30년이 됐다. 고대 물 먹어 본 적 없던 나를 위해 원로 교수님께서 정성껏 신임교수 오리엔테이션을 해 주셨다. 고대만의 전통이라며 아름다운 고대어(高大語)를 알려주셨다. ‘대학’ 대신 ‘학교’라 했으며, ‘동문, 동창’ 같이 그저 그런 표현 대신 ‘교우’라는 정감 어린 말을 썼다. 특히 ‘교수님’이 아니라 ‘선생님’이라 부른다고 배웠다. 물론 상식 있고 뼈대 있는 사람은 ‘고연전’이란 우아한 말을 써야 한다는 건 고대에 오기 전부터 진즉 알고 있었다. 나도 그 정도는 안다. 고대어는 용어만 다른 게 아
내 이마엔 붉은색의 긴 점이 있다. 나는 내 얼굴에 익숙해서인지 그 점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눈엔 그 점이 꽤 크게 보였나 보다. 초등학교 1학년 땐 급식실에서 ‘이마에 김치가 묻었다’란 말을 들어보기도 했고, 미용사는 유난히 내 이마에 손을 대지 않았다. 부모님도 아들의 이마에 난 점을 걱정했다. 결국 난 대학 병원에서 피부 수술을 받기에 이르렀다. 안타깝게도 수술 이후 점은 더욱 커졌다. 돌이켜보면 그 수술은 순전히 남의 시선 때문에 진행한 것이었다. 정작 나는 아무렇지 않은데 주변에서 내 이마를 바라보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는 개조 인간들이 사는 미래 세계를 그린 SF물이다. 목에 USB 단자가 달려 있어 칩을 삽입하면 손쉽게 정보를 습득할 수 있다. 주인공 데이비드에게 폭력을 휘두르던 남자는 ‘쿵푸 칩’을 목에 넣자 한 번도 배운 적 없는 쿵푸 동작을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몸에 기계를 이식하는 사람도 많다. 데이비드는 척추를 적출한 후 군용 기계 장치인 ‘산데비스탄’을 이식했고, 마치 시간을 멈춘 것처럼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을 얻었다. 주인공의 동료들도 팔에 총을 이식하거나 손이나 입에 기계를
어떤 소리는 너무 멀어서 들리지 않는다. 간신히 들려도 잔향은 오래 머물지 않고, 사람들은 곧 잊어버린다. 2010년 어느 날, 당진의 한 철강업체에서 작업 중이던 20대 청년 하나가 용광로 쇳물 속으로 사라졌다. 펄펄 끓는 용광로 쇳물에 사람이 빠져 흔적 없이 사라지다니. 설화나 민담도 아니고 21세기 산업도시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다니. 사람들은 경악했다. 누군가는 그 사건을 두고 ‘그 쇳물 쓰지 마라’라는 제목의 추도시를 썼고, 시로 노래를 만들었으며, ‘공유’하며 퍼 날랐다. 시민들은 청년을 안타까워했고 진심으로 애도했다. 하
○···호형들, 두 가지 무(無)의 그림자가 캠퍼스에 드리웠소. 하나는 ‘무관심’이란 그림자요. 이 그림자는 하도 오래돼서 더 이상 진부하오. 지난주 서울총학생회장단 재선거 공청회도 그랬소. 그날 과학도서관 대강당에는 누구든 정적을 깨주길 기다리는 사회자, 경쟁자 없는 후보, 기자와 촬영 스태프만이 자리를 채웠소. 공청회 2부가 그렇게 기억에 남더군. 중선관위장이 현장 질의를 받기 시작하자 잠시간 공청회장에 정적이 드리웠소. 질문을 던질 호형이 한 명도 없어 기자들이 1부 때 쓰고 남은 질문을 마저 소진해야 했소. 화면으로 지켜보는
청년세대는 22대 총선에서도 공천과 공약에서 홀대받고 있다. 청년 정책은 재원 확보 방안 없이 약속되고 있고, 양당의 지역구 공천 확정자 중 2·30대는 3% 수준에 불과하다. 청년 할당제는 선거철마다 논의되지만 제대로 이뤄진 적이 없다. 인요한 혁신위원회가 청년 전략지역구 선정, 비례대표 당선권 내 청년 50% 할당 등을 국민의힘 지도부에 제안했고, 한동훈 비대위장은 청년세대를 밀어주겠다며 국민 공천제도를 도입했다. 더불어민주당은 당규에 청년 10% 공천을 명시했다. 그럼에도 더불어민주당은 지역구에 2·30대를 고작 9명 공천했다
요즘 정치권이며 언론이며 연일 ‘출산율’ 문제로 시끄럽다. 합계출산율이 1을 하회하기 시작하면서, 대한민국 인구는 2020년 역사적 고점을 찍고 2021년부터 하락 전환됐다. 인구통계의 장기적 추세를 바꾸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임을 감안할 때, 단기간 내에 출산율이 유의미하게 반등하지 않는다면 급격한 인구절벽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에 정부는 역사상 마지막으로 70만명 이상이 태어난 1990년대 초반생에게 희망을 걸고 다양한 정책들을 내걸고 있다. 나는 마지막 희망이라는 1990년대 초반 ‘가임기 여성’이다. 얼마 전 결혼을
큰 사람일수록 실현 가능한 꿈을 가지고, 갈수록 꿈을 키우며, 못난 사람일수록 애초에 허황된 꿈을 꾸다가, 시간이 갈수록 움츠러든다. 내가 부임한 2004년 졸업반이었던 한 학생은 학자의 꿈을 키웠으나 가장의 역할을 해야 해서 꿈을 접어야만 한다고 했다. 나는 호되게 그를 꾸짖으며 꿈을 버리지 말라고 했고 머뭇거리던 학생은 이내 MIT, 영화 오펜하이머 때문에 알려진 Los Alamos National Lab 등에서 승승장구하며 지금은 해외 명문대에서 교수로 교육과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결국 그가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해서 이룬
국내외적으로 부의 불평등이 심각해졌다. 극심한 불평등은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을 야기할 뿐 아니라, 국내외 분쟁과 갈등을 증폭시키는 경향이 있다. 불평등과 분쟁의 관계를 연구한 월터 샤이델(Walter Scheidel, 1966~)에 따르면, 역사적으로 인류가 이렇게 심각한 불평등을 해소했던 방식은 대규모 전쟁, 급진적 혁명, 국가 실패, 치명적인 전염병 등의 폭력적인 사건이었다. 1900년대 초의 심각한 불평등은 두 차례의 세계 대전과, 2500~5000만 명이 사망한 스페인 독감, 그리고 공산 혁명 등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190
새 학기를 맞아 학교가 들떠있다. 2월까지 잠잠했던 캠퍼스가 점심, 저녁 밥약으로 북적이고 하나둘 피어오르는 꽃봉오리들은 활기를 더한다. 매일 같이 있는 행사들로 학교는 오늘도 조용할 틈이 없다. 화려한 동아리박람회 부스, 1초 만에 마감되는 합동응원전 티켓 배부는 모두의 관심사지만 민주광장에서 선거 유세를 하는 선본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지난해 12월 제54대 서울총학생회장단 선거는 유효 투표율 33.33%를 넘기지 못해 무산됐다.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는 학생 사회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함을 모두가 알고 있지만 정작 투표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