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5월 5일, 본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가 문을 연지 100년이 됐다. 본교는 이를 기념하기 위한 △건축 △편찬 △모금 등의 사업을 진행 중이다. 특히 100주년 기념위원회의 행사분과위원회는 △문화 △전시 △체육 △홍보분야로 나눠 갖가지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본교 오는 5월 5일(목)에 본교 중앙광장에서 개교 100주년 기념식이 열린다. 이 기념식
쿠키닷컴이 개강을 앞두고 대대적인 사이트 개편을 단행했다. 쿠키에는 생활정보, 웹진 등 유용한 정보들이 들어있다.
한겨레 인터넷신문 뉴스부 김노경 기자'인터넷 점령현상’이 가속화 되고 있다. 신문도 예외는 아니다. 인터넷 신문은 종이신문 이상의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독자들의 활발한 참여를 유도하며 최고의 참여 신문으로 평가 받는 한겨레 인터넷 신문의 김노경(인터넷 한겨레 뉴스부 기자)를 만나서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한겨레 인터넷 신문의 디자인은 타 신문
중앙대학교는 지난해 9월부터 자게 실명화를 실시했다. 당시 문과대 학생회(회장=김민석) 사이버팀이 ‘클린자게추진위원회’를 결성, 학생들과 학교측의 협의를 이끌어낸 결과였다. "학교 게시판이 중요한 문제나 여론파악을 하는데 있어 중요한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무책임한 어휘나 욕설을 사용하는게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기 표현에 책임을 질수 있는
봉건체제의 몰락과 근대 시민사회 형성과 그 역사적 맥락을 같이하고 있는 신문매체는 약 300년의 역사를 자랑하며, 20세기의 출발과 함께 시작한 방송매체는 그 사회적 영향력을 바탕으로 여론형성이나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중추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인터넷은 불과 십 수 년 만에 이들 전통매체와 필적할 만큼 우리 일상생활에 깊이 침투하고 있다. 붉은 악마, 노
올해로 인터넷신문이 국내에 등장한지 10년이 된다. 지난 1995년 3월 <중앙일보>가 처음으로 인터넷을 활용해 뉴스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이후 삼풍백화점 붕괴 등의 참사를 신속하고 깊이 있게 보도해 해외 교민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1995년 말에는 <조선일보>, <서울신문>, <코리아 헤럴드>, 1996년에는
지난 2일 고대신문은 2005학년도 1학기 개강에 맞춰 새롭게 단장한 ‘쿠키’를 선보였다. 쿠키는 지난해 11월에 태어난 고대웹진으로 인터넷미디어시대에 발맞춘 고대신문의 야심찬 기획이다. 쿠키는 인터넷공간의 특성인 상호커뮤니케이션기능과 편리한 접근성을 이용해 학내매거진으로써 학생들과 좀 더 많은 교류를 하게 된다. 쿠키는 기존의 종이신문이 갖는 매체적 한계
쿠키는 2004년 11월 온라인 상에 등장했다. 고대를 대표하는 웹진으로 자리잡아 갔으나 운영진들 사이에서 쿠키만의 고유한 색깔을 찾자는 의견이 제기됐고, 시스템상의 업그레이드도 요구됐다. 그래서 지난 12월 겨울방학을 기점으로 쿠키는 본격적인 리뉴얼 작업에 들어갔다. ‘웹진이란 무엇인가?’란 근본적인 물음에서 시작해, ‘고대를 여는 열쇠, 쿠키닷컴’이라는
등록금이 매년 인상돼 대학생들의 가계에 부담을 주고 있다. 대학들은 이러한 학생들의 사정을 고려해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본교의 경우 △학생가장장학금 △면학장학금이 대표적인 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많은 학생들의 경우 장학금의 종류나 선발 기준, 지급 액수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본교 면학장학금은 가계형편이 곤란하며
근로 장학금이란 교내 각 행정기관에서 업무보조할 학생을 선발해 지급하는 아르바이트 형태의 장학금이다. 이는 거의 모든 학교에서 실시하고 있는 장학제도이다. 그러나 본교와 다른 학교의 근로 장학제도는 큰 차이가 있다. 이화여대 장학팀 오지은 씨는 “가계 곤란도와 학생의 학년과 적성, 특기를 기준으로 근로 장학생을 선발한다”고 말했다. 반면 본교는 특별한 선발
본교에서는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을 실시하고 있지만, 장학금의 수혜를 받지 못하거나, 받아도 여전히 어려운 상황에 놓인 학생들이 많다.김병수(가명)씨는 지난 해 본교 안암캠퍼스에 입학한 학생이다. 아버지는 개인택시를 몰고, 어머니는 병원에서 음식 만드는 일을 했다. 입학할 당시 아버지가 뇌신경의 문제로 일을 할 수 없게 돼 결국 택시를 처분
서창캠퍼스는 설립 당시부터 예산문제로 논란이 많았다. 학교 측은 총 소요예산을 80억원으로 잡았으나, 학교에선 10억원만 확보할 수가 있었다. 설립 당시 1981년 기숙사, 1983년 학생회관을 완공하기로 하였으나 각각 1987년, 1997년에 완공될 수가 있었다.1980년 4월7일부터 이틀간 총학생회 선거권과 분교정책과 관련해 본관 앞에서 시위를 하기도
2000년대 초반 학생들은 구속·수감된 학생들의 석방과 등록금 인상 반대를 요구했다.2000년대 들어 한총련과 관련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수배된 학생들이 늘어나면서 충남경찰청, 대전교도소에 항의 방문을 하는 등 구속학생 석방을 위한 시위가 진행됐다. 2001년의 경우 등록금 인상에 반대해 행정관을 점거하고 민주납부제를 추진했으나 실패해 등록금 환불
1997년 한총련이 이적단체로 규정된 이후 국가보안법과 관련된 사건이 학·내외에서 발생했다.1995년 5.18관련 국민대회에서 강제 연행된 신정인(경상대 경영91)씨의 석방을 위한 시위를 진행하던 중 학내에 진입한 경찰이 학내에서 총기를 발포했다. 이에 서창총학은 인권단체와 기자회견을 열고 충남지역학생회와 연대시위를 진행했다. 기자회견 후 조치원 읍내로 나
1990년대로 넘어오면서 1980년대 후반 격렬했던 학원민주화 시위가 산발적으로 이어졌고 학생복지 문제가 본격적으로 거론됐다. 1991년에는 1980년 후반 시위로 퇴학조치 당한 학생들의 징계철회와 합리적 등록금 책정요구가 있었다. 이를 학교 측에 요구하며 총학생회장의 삭발식과 간부들의 혈서의식, 행정관 및 본관회의실 점거 사태가 발생했다. 1980년 후반
조치원으로 이전 이후, 서창캠퍼스 전반적인 문제들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문제 해결을 위한 학생들의 요구는 1980년대 후반 대규모 시위로 번졌다.당시 서창캠퍼스의 전반적인 문제는 △구조적 문제 △시설문제로 나눠 볼 수 있다. 당시 서창캠퍼스는 2개 단과대임에 불구하고 학장이 1명이었고 서창캠퍼스 13개 학과에만 국한돼 부전공을 할 수 있었다. 또 성균관대 수
현행 총학생회체제가 확립되기까지 다양한 변화가 있었다.서창캠퍼스가 분교로 승인을 받은 1980년 15대 선거에서는 서창캠퍼스 학생들에게 투표권이 없었다. 이후 1982년 단과대(문리대, 경상대)로 개편되면서 1984년 총학생회 선거부터 서창캠퍼스 학생들에게도 총학생회 투표권이 주어졌다. 당시에는 현재와 비슷하게 총학생회장 1인과 부총학생회장 1인이 팀을 이
서창캠퍼스 학원민주화운동은 1980년대 후반, 절정에 이르렀다. 학원민주화운동은 1970년대 말부터 크게 일기 시작한 사회 전반적인 민주화 운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당시 정칟사회의 민주화운동의 중심은 대학생이었고 이들의 활동은 학교로 이어져 학원민주화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됐다. 본교는 1979년 11월 26일 15개 서클이 학원민주화 선언을 발표해 학원
1979년 9월 22일, 수도권의 인구분산과 지방의 고등교육 향상을 도모하는 정부의 시책에 따라 문교부가 본교 서창캠퍼스 설립을 인가했다. 이듬해 3월, 총 8개학과 400명의 신입생의 입학으로 서창캠퍼스는 시작됐다. 하지만 현지(조치원)에 수업환경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1980년 서창캠퍼스 신입생들은 1년 동안 안암캠퍼스에서 수업을 받았다.1980년대
한석규 이후 한동안 부재중이었지만, 동심어린 해맑음으로 또 다른 ‘순수청년’의 아이콘으로 급부상한 조승우의 캐스팅과 자폐아 열연은 영화 <말아톤>의 성공을 일찌감치 예견했다. 영화 속 간간히 뿌려진 초원이의 좌충우돌 에피소드가 흥행대박의 촉매 역할을 톡톡히 했음은 물론이다.하지만 주인공의 열연과는 상관없이, 한 사람의 일대기 혹은 인생 역정 극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