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공간엔 흔적이 남는다. 그해 4월 할아버지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할머니가 집에 돌아오자마자 한 일은 할아버지의 옷을 모은 것이었다. 대문 앞에 생전 입으시던 자켓이며, 한복이며, 양말까지 옷들이 수북히 쌓였다. 왜 벌써부터 이러시냐고, 나중에 하라고 자식들이 말려도 할머니는 뭐에 홀린 양 옷을 찾고 던지고, 찾아 쌓고를 반복했다. “다 태워뿌라.” 모든 옷이 다 쌓이자 그제야 쉬셨다. 물건 모으는 취미도 없으셨던 할아버지 덕에 그렇게 할아버지의 흔적은 쉽게 사라졌다.사라진 줄 알았으나 사라지지 않았다. 그해 9월 추석, 큰집 문
고양이 ‘시루’만이 벤치 자리를 지키던 다람쥐길에 왁자지껄한 목소리와 무리지은 발소리가 이어졌다. 고요했던 방학과 달리 들뜬 소음이 가득했지만, 고양이는 보는 이도 흐뭇한 낮잠을 놓지 않았다. 개강은 방학을 즐기던 학생에게도, 방학 내내 학교를 지키던 고양이에게도 놀라운 날이다. 개강호 신문 발행 후 독자위원 4명의 신문 평가서가 고대신문에 전달됐다. 편집실 벽 한 켠에 평가서를 붙이자 기자들이 우루루 달려와 본인 기사가 있는지부터 찾았다. 독자위원은 제기시장 화재 사건 기사가 페이스북에서 실시간으로 전달된 점을 높이 평가했다. 다
방학과 개강 사이, 고대신문이 여러분을 기다립니다 낯선 목요일 개강이다. 월요일 개강에 익숙한 학교 구성원들이 어정쩡한 개강 요일을 탐탁치 않아 한다는 말이 들려온다. 고대신문 역시 개강 주에 낼 개강호를 만들었지만, 방학 중 신문이 배포돼 아쉬워하고 있다. 신문을 만드는 사람은 언제나 더 많은 사람이 신문을 봐줬으면 해서다. 학생들로 복작복작한 캠퍼스를 고대신문은 열렬히 기대하고 있다. 문화가 흐르는 고대신문 이번 학기에는 새로운 코너 ‘타이거 쌀롱’을 연재한다. 지난 학기 독자들의 호평 속에 마무리했던 ‘고대인의 밥상’의 후속
주로 젊은 세대에서 ‘덕질’이란 표현은 팬 활동이나 깊이 있는 취미생활로 이해된다. 2000년대 중반부터 오타쿠를 순화한 ‘덕후’란 표현이 등장하면서 특정 인물이나 취미에 깊게 빠진 사람을 통칭하고 있다. 취미의 사전적 의미는 ‘전문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즐기기 위한 행위’이지만, 덕후 세계에서는 취미에 그치지 않고 전문가의 영역으로 나아간 사람을 성공한 덕후라 말한다. 취미가 직업이 되어버린 일명, ‘덕업일치’를 달성한 덕후 세 명을 만나 깊이 있는 취미생활이 그들의 삶에 미친 영향을 들어봤다.일하면서 놀고, 놀면서 일하고 (보
영화로 생소한 국가의 문화 이해수요 적지만 지역주민 유인 가능 빨간 철제 계단을 올라 건물에 들어서자 매표소가 보인다. 상영시간표에는 흥행 중인 영화인 대신 이 쓰여 있다. 이곳은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없는 안암동에 자리 잡은 독립예술영화전용관(전용관) KU시네마트랩이다. 국내외 독립예술 영화를 전문으로 상영하는 전용관은 서울 시내에 15개가 있으며, 그중 대학 내 위치한 전용관은 이화여대, 건국대, 고려대 세 곳이다. 2008년 대학 내 영화관으로는 처음으로 이화여대에 ‘아트하우스 모모’가 생긴 이후
#그는 대학에서 매 학기 ‘나’를 만들었다. 40분 이내의 짧은 시간에 맞게끔 시나리오는 조금씩 뜯어졌다. 소박한 카메라가 일주일 동안 나의 장면들을 담아냈다. 장면과 장면의 조합으로 의미를 만들기 위해 밤낮을 잘리고, 붙이며 편집 당했다. 그는 수업 시간에 6개월 동안 고민과 고생을 거쳐 완성된 나를 스크린에 투사했다. 그의 친구들은 자신이 원하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되자고 서로를 다독였다. 그는 단편영화가 관객을 만날 유일한 통로인 영화제에 나를 출품했다. 다행히도 수상했고, 영화제에서 나는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를 한몸에 받았
예술인 파견지원 사업활동비와 일자리 제공공공예술의 새로운 흐름 반영 예술인에게서 ‘작업실’은 떨어뜨릴 수 없는 단어다. 미술작가는 화실에서 작품에 집중하고, 연극배우는 무대 뒤편에서 연습하는 모습이 자연스럽다. 기업이나 도서관, 주민단체 같은 공공기관과 예술인의 협업은 아직 시작단계다. 그렇지만 어느새 예술과 기업의 협업은 시대적 요청이 되고 있다. 기업 안팎에서 예술 경영, 창조적 혁신을 요구하고 있다. 세계적인 IT기업들은 입주작가(art-in-residency) 프로그램으로 예술인을 기업에 상주시켰다
작년 6월 배우 판영진 씨는 “숨 막힐 정도로 고통스럽다”는 말을 남기고 차안에 번개탄을 피워 자살했다. 판 씨는 작년 메르스 여파로 공연이 줄줄 취소되면서 가중된 생활고를 견디지 못했다. 2011년 예술인 복지법이 제정돼 한국예술인복지재단(복지재단)을 필두로 다양한 복지사업을 진행했지만, 그의 죽음을 막진 못했다. 복지법은 예술인의 법적 지위를 보장하고, 이들이 생활고로 창작활동을 중단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마련됐다. 하지만 예술인 단체는 복지법이 현실을 담아내지 못한다며 지속적인 보완을 요구하고 있다.복지 지원기준인 예술활
오후 4시 보배곱창 집의 문이 열렸다. 사장 이경희(여·47) 씨가 냉장고에서 재료를 꺼내기도 전 손님이 찾아왔다. 집에서 갓 나온 듯 슬리퍼를 끌고 나온 남성은 야채곱창 포장을 주문했다. 곧이어 5인 가족이 가게를 찾아왔다. 연휴를 즐기다 저녁을 해결하기 위해 나왔다. 보배곱창은 제기동에서 12년 동안 주민들이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가족들에 깨끗한 음식을 고집하는 주부들도 보배곱창의 ‘깨끗함’을 믿고 찾아온다.보배곱창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구리 보배곱창의 제기동 지점이다. 제기동 보배곱창 사장 이경희 씨는 원조가게 사장의 조카
성장중심주의 한국은 도시의 역사적 흔적을 보존하는 것보다 개발하는 것에 더 익숙했다. 서울 도심에서 옛 흔적이 남아있는 건축물은 많지 않다. 서울의 가옥 갱신주기는 서구도시보다 훨씬 짧아 30년 이상을 넘기지 못한다. 한국을 연구하는 프랑스 지리학자 발레리 줄레조는 2009년 저서 ‘아파트 공화국’에서 서울의 주거공간은 유동의 문화를 띄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유동의 문화는 이미 지어진 가옥의 영속성에 집착하는 축적의 문화와 달리 시간의 빠른 순환을 중시한다”고 했다. 본교와 인접한 청량리동, 정릉동에는 50년 역사를 간직한 건축
한국에서 도시정비 정책 패러다임은 전면철거 재개발 정책에서 도시재생으로 바뀌었다. 4월 18일 황교안 총리는 도시재생특별위원회를 열어 신규 도시재생사업 33곳에 3100억 원을 지원할 것을 의결했다. 2000년대까지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쇠퇴한 구도심을 전면철거 재개발 방식으로 개발했지만, 주민 공동체를 파괴하고 골목길이나 시장 같은 도시문화 공간을 없애 도시 정체성을 약화시켰다는 비판을 받았다. 최근에는 도시의 과거 흔적과 주민 커뮤니티를 보존하면서 ‘재생’하고자 하는 정책적 지원과 연구가 활발하다. 낡거나 못 쓰게 된 물건을 가
눅(nook)서울은 구불구불한 후암동 골목에 있는 80년 된 일본식 목조주택이다. 서울역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 서울의 급성장을 지켜봤다. 하지만 세월의 흐름에 무색하게 눅서울은 ‘낡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전자 도어락을 열고 들어가면 100년을 바라보고 있는 나무의 짙은 향기가 나지만, 그 안을 채우고 있는 가구와 인테리어는 현대적 감각으로 꾸며져 있다. 주인 이호영 대표는 이 오래된 건물을 보존하고, 온전히 주거기능을 하도록 복원해서 ‘재생’ 시켰다. 아늑하고 조용한 곳을 의미하는 눅(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