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 읽고 나면 잔상이 오래 남는다. 영웅담이나 영화적 전쟁 미학과는 거리가 먼, 날것 그대로의 이야기다. 마치 전쟁처럼 이 책은 불편하고 논쟁적이며 때로는 추하다. 저자는 전쟁을 미화하지도, 반대로 단죄하지도 않는다. 단지 기자로서 자신이 목격한 전쟁의 현장을 독자가 함께 마주하도록 내버려둘 뿐이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점은 라이트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 자체다. 대부분의 기자는 안전지대에서 브리핑을 듣거나 검열된 정보를 전해 받는다. 그러나 라이트는 해병대 정찰대 차량에 올라탔다. 헬멧을
요즘 부정적인 감정 퇴치가 유행인 듯하다. 성공한 사람의 ‘긍정적 생각 키우는 법’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고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명상 앱 시장 규모는 2027년에 11조 원대에 이르리라 전망된다. 저자는 부정적 감정을 적게 느껴야 한다는 통념에 반기를 든다. 그는 오히려 우리가 분노, 질투심, 부러움, 고소함, 경멸 같은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실제로 자주 분노하면 스트레스가 쌓이지는 않을까? 언뜻 들으면 저자의 주장은 익숙한 생각과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는 듯해 이질감이 든다. 하지만
요즘 SNS 댓글을 보면 눈살이 찌푸려질 때가 많다. 누군가의 글이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과 다르면 득달같이 반박하고 과거의 추억을 회상하는 댓글에도 “내 경험과는 전혀 딴판”이라며 쪼아 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타인의 이야기와 내가 아는 것이 다를 때 꼭 “너는 틀렸다”고 지적하는 것만이 옳은 일일까? 의 주인공 에이제이 피크리는 누군가가 자신의 서점에 아이를 두고 가는 바람에 졸지에 마야의 아버지가 된다. 새로 방문한 출판사 영업사원 어밀리아의 책 추천을 매몰차게 거절하며 쫓아낼 정도로 괴
우리는 흔히 슬픔을 행복에 도달하기 위해 벗어나야만 하는 감정으로 규정한다. 상처와 고통은 부정적인 것이고 행복은 긍정적인 것이니 이 둘은 정반대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때로는 고요한 삶 속에서도 상실을 갈망하는 충동이 스며들고 그 슬픔 속에서 비로소 나를 선명히 마주하기도 한다. 고통 앞에서야 비로소 나의 연약함과 진심을 알아채는 순간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슬픔이 단순히 지나쳐야 할 감정이 아니라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게 하는 문이 되는 순간이 있다. 인간은 슬픔 속에서도 행복을 발견할 수 있는 존재다. 가벼운 기쁨 속에
난폭한 살인, 낭자한 선혈과 시커먼 미움과 원한. 그 속을 걸어 다니며 단서를 찾는 탐정과 그의 조수. 추리소설 하면 떠오르는 요소들이다. 하지만 잔혹한 요소들이 필수라고 할 수야 있겠는가. 요네자와 호노부(米澤穂信)의 추리소설, ‘소시민 시리즈’는 이를 가히 입증하고도 남는다. ‘소시민 시리즈’는 요네자와의 추리 소설로 다섯 개의 중심 스토리와 하나의 외전 스토리로 구성돼 있다. 각 소설의 표제엔 각 계절에 걸맞은 한정 디저트의 이름이 들어가 있다. , ,
단편 소설의 생명은 경제성이다. 좋은 소설은 한 단어를 빼도 한 단어를 더해도 무너지는 정교한 구조물이다. 아주 유구한 소설 창작 강령이다. 그런 만큼 ‘미니멀리즘 소설’이라는 양식은 어딘가 어색하게 다가오는 면이 있다. 애초에 미니멀리즘이 소설 창작의 기본자세인데 그렇게 따로 분류해야 할 만큼 차별화되는 점이 무엇일까. 어쩌면 그들의 방식은 이제 누구나 아는 정석으로 자리 잡아 더 이상 새롭지 않은 걸까? 이게 카버의 명성에 대한 내 첫인상이었다. 의 수록작 ‘깃털들’에서 눈에 띈 건 묘사와 대사였고 그건 나를 당혹스레
리단 작가의 는 정신질환을 겪는 사람들의 삶과 감정을 생생히 담아낸 책이다. 조울증을 중심으로 작가의 경험뿐 아니라 정신병동에서 만난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까지 다루고 있어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에 대한 편견을 깨고 그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해준다. 정신질환을 직접 겪어보지 않은 나는 이 책을 통해 그들의 마음에 조금이나마 다가갈 수 있었고 책을 덮은 뒤에도 오래도록 여운이 남았다. 정신질환은 일부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으며 누구든 그 경계 안팎에서 살아간다. 감정이
무정형의 삶. 정형되지 않은 삶에 대한 두려움과 갈망은 대다수에게 공존하는 감정이 아닐까?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있다가도 정해진 대로 살면 되는 현실에 안주하는, 어쩌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고민으로부터 나는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은 저자가 두 달간의 파리 여행에 대한 기록을 남긴 산문집이다. 어릴 때부터 꾸준히 파리라는 도시를 소위 ‘짝사랑’해 온 저자는 퇴사 후 파리로 두 달간의 여행을 떠난다. 평생을 모범생처럼 살아온 그녀가 40대라는 회사를 그만두기엔 다소 이르게 느껴지는 나이에 퇴사하
우리는 모두 소중한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상대를 기쁘게 하거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기 위해 때로는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는 각자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전하고 싶었던 말들을 하지 못했던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해미는 어린 시절 언니 해리를 큰 사고로 잃고 어머니와 여동생 해나와 함께 독일에서 살게 된다. 독일에서 있던 여러 일로 인해 해미는 사람에게 받는 상처에 쉽게 두려움을 느끼며 솔직해지는 대신 도망치는 것을 선택해 왔다. 그렇게 몇십 년이 흐른 후 그녀는 우연히 즐겨보던
‘이별의 능력’이라는 시집 제목은 이상하지 않았다. 내게 이별은 따로 떨어지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별이 발생하는 것과 내가 이별하는 것의 차이라고 하겠다. 맞잡았던 마음을 완전히 떨어뜨리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놀라울 만큼의 능력이 필요하다. 시집의 첫 시는 ‘발’이고 두 번째 시는 ‘이별의 능력’이다. 능력을 요하는 이별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의 발로 사랑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발’의 마지막 연에서 무용수들은 손을 발에서 가장 멀리 떨어뜨린 채 쓰러진다. 발이 사랑의 끝을 향해 춤추는 동안 손은
세상에 잊기 좋은 이름이 있다면 슬플 것이다. ‘잊기 좋다’는 말에 이름은 제 역할을 뺏긴다. 산문집의 제목을 처음 봤을 때 마음이 심란해졌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 였다. 김애란이 부른 수많은 이름 중에 정말 잊을 만한 이름이 있다는 것인가. ‘맛나당’은 김애란의 어머니가 운영하던 가게로, 김애란에게는 꿈과 이야기의 장소다. 그 시절을 관통하는 어머니의 취향과 의지는 김애란을 키운 ‘팔 할’이 되었다. ‘나는 우리 삶에 생존만 있는 게 아니라 사치와 허영과 아름다움이 깃드는 게 좋았다. 때론 그렇게 반짝이는 것들을 밟고 건너야만 하는
제인 오스틴의 은 19세기 영국 사회를 배경으로 다양한 인간 군상과 관계의 복잡성을 다룬 걸작이다. 주인공 엘리자베스 베넷(Eliza beth Bennet)과 피츠윌리엄 다아시(Fitzwilliam Darcy)의 사랑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 소설은, 단순한 로맨스를 넘어 인간 내면의 성장과 편견, 계층 간의 갈등을 통해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깊이 탐구한다. 오스틴은 사랑이라는 주제에 사회적, 윤리적 가치를 담아내며, 특히 인물들의 성격과 대화를 통해 그들의 내면 변화를 섬세하게 묘사한다. 의 주요
‘무엇이 첫사랑과 첫 우정을 구별하는가?’ 프랑수아즈 사강이 절친한 친구 베로니크 캉피옹에게 보내는 편지의 한 구절이다. 과 속 두 사랑 이야기로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게 된 사강에게 사랑과 우정은 ‘잎담배를 마는 얇은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했다. 사강과는 사뭇 다른 삶을 사는 지금의 우리에게 우정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나의 삶을 돌아봤을 때 내게 사랑은 절대적이고 숭상할 만한 것이었지만, 우정은 당연한 것이었다. 어디선가 ‘사랑’이야말로 젊음의 특권이라고 배웠고, 사랑만이 나를 인
은 싱클레어라는 남자아이가 자기 자신을 찾는 여정에 관한 이야기다. 싱클레어의 친구 혹은 조력자인 데미안은 그에게 통찰을 준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세상을 비판적으로 읽는 방법과 세상이 악으로 규정한 것들의 가치를 알려준다. 보통 은 ‘선악의 통합적 수용’으로 해석된다. 그렇다면 학교폭력이나 칼부림 같은 범죄도 수용될 수 있는 악인가? 아니다. 데미안은 악을 조건 없이 허용하자고 말하지 않았다. 남에게 해를 끼치는, 심지어 자신까지 피폐하게 만드는 행동은 용납될 수 없다. 그렇게 행동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악을
“당신이 좋아서 당신이 독립된 국가에 살기를 바랍네다.” (p. 36) “네 한 사람 나가고 내 한 사람 가입하는 거이 아이디. 내래 일당백 일당천 할 거이니까네, 삼이 네 덕에 파업단에 백 명 보탬 되구 천 명 보탬이 된 거이다. 알갔어?” (p.177) 전빈은 주룡을 사랑해 독립운동가로 살았고, 주룡은 전빈을 사랑해 그 길에 함께 뛰어든다. 주룡은, 학생이 되고 싶었으나 꼼짝없이 공장에 취업해야 했던 옥이와, 회사 측의 협박으로 노동조합에서 탈퇴할 수밖에 없었던 삼이를 사랑했기에 노동운동에 투신한다. 어떤 이들은 사람들을 아프게
300년 동안 수많은 수학자의 열정과 삶을 요구한 희대의 난제를 제시한 동시에 중학생도 이해할 수 있는 간단명료한 문장으로 쓰인 명저, 다. 이 책은 무한대의 도미노를 쓰러뜨리기 위한 투쟁의 역사를 몰입감 있게 그려내며 비전공자도 그 여정을 즐기게끔 한다. 1993년 앤드루 와일즈는 타니야마-시무라의 추론을 완벽히 설명해 내며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증명을 ‘끝내고’ 볼프스켈상을 받았다. 어쩌면 이것이 책의 결론이다. 이 바쁜 시대에 우리는 모든 일의 요약을 간편하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배우는 것들
삶에 속도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만일 그렇다면 인간은 어떤 속도로 나아가야 하는가? 소설 은 그 제목부터 질문에 아주 명쾌한 해답을 내려주고 있다. 빠른 것이 곧 정답이 되고 명예가 곧 권력이 되는 현대사회에 이 200페이지가량의 소설은 ‘속도’와 ‘느림’의 미덕을 이야기한다. 이야기는 어느 프랑스 호텔로 향하는 도로 위에서 시작된다. 아내 베라는 프랑스 도로 위에서 하루 몇 명의 사람이 죽는지 열변하고, 운전대를 잡고 있던 ‘나’의 시야에 옆 차선의 자동차가 들어온다. 자동차는 왼쪽 지시등을 초조하게 깜빡이며 추월의 기회만
한 남자가 침대에 누워 있다. 누군가에게 얻어맞은 듯한 몰골과 날카롭게 벼려진 투쟁적인 눈빛은 그가 정치범이라는 점을 부각한다. 반대편 침대에는 한 여자가 있다. 그가 남자의 몸을 가지고 있기에 세상은 그를 남자로 본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도 자신이 여자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남성을 사랑하는 인물이다. 는 아르헨티나 작가 마누엘 푸익의 작품으로, 같은 감방을 쓰는 성소수자 몰리나와 정치범 발렌틴의 이야기를 다룬다. 인간이 인간답게 취급받지 못하는 곳에서 지독한 현실을 잠시라도 잊기 위해 몰리나는 영화 이야기
고대인에게 추천할 단 한 권의 책을 고르다 보니 미궁을 헤매는 테세우스가 된 기분이었다. 선택의 갈림길에서 을 고른 건 이 책이 그 어떤 책보다 내 가슴을 불태웠기 때문이다. 사르트르가 책의 서문에서 말했듯, 나도 “이 책을 읽어라”고 말하려 한다. 물론 이 책은 출간된 지 벌써 60여년이 흘렀고 책의 주된 내용인 탈식민화 역시 너무 옛이야기 같다. 많은 석학이 이 책을 해석하고 재해석해 이미 닳아버린 지 오래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이 책을 강력히 권한다. 책을 간단히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프랑스
삶의 불가해와 그 번민은 수많은 철학자의 주제가 돼왔다. 그러나 그들에게만 작용하지는 않았다. 노동자들, 기어코 학생까지 내려와 고통에 빠지게 했다. 이 책을 읽었을 때가 그러한 삶의 불가해 속에 빠져 있었을 때였다. 나는 번민으로부터 도망쳐 자주 오르던 산에서 책을 읽고 번민에서 벗어나 산에서 내려왔다. 그러나 후지무라 마사오는 번민에 게곤 폭포에 몸을 던지는 극약을 뒀다. 후지무라는 소세키의 제자였다. 예습을 해 오지 않을 것이라면 수업에도 들어오지 말라며 그를 힐난하였던 소세키는 제자가 “불가해. 내 이 한을 품고 번민 끝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