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의 GV(관객과의 대화) 행사에 나서며 나는 첫 일성으로 이렇게 말했다. “한국 영화에서 작업 현장이 이렇게 많이 나오는 건 처음 봅니다” 그래서 놀랍다는 얘기였다. 왜 우리는 영화에서 일하는 장면을 거의 보지 못하는 것일까. 깊이 생각할 필요가 없다. 일이 좋은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위험하고 거친 작업 현장이라면 더욱 그렇다. 카를 마르크스(Karl Marx)의 통찰을 슬쩍 빌려 온다면, 이렇게 해서 노동이 생산물로부터 소외되기 때문이다. 즉 노동자는 상품을 생산하지만 그것은 노동자의 것이 아니다. 다
각별한 관심 때문에, 유령이 등장하는 소설들을 연이어 소개하게 되었다. 한강의 유령이 역사적 폭력의 증언자라면, 정보라의 유령은 원념(怨念)을 품은 무서운 타자다. 오늘 소개할 유령은 억울하거나 무섭지 않다. 생시와 똑같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산 자에게 다정하게 말을 건네는 선한 이웃이다. 윤성희의 단편 ‘자장가’에 등장하는 유령이다. 윤성희는 유머를 가장 잘 다루는 작가 중 한 명이다. 윤성희가 소개하는 유머는 냉소나 풍자와는 거리가 멀다. 윤성희식 유머는 인간의 선함과 다정함을 동시에 드러내는 정동 발생 장치다. 작가가 중요하게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음악 시상식인 그래미 어워즈는 전 세계 대중가수들에겐 영광스러운 무대이자 손에 잡히지 않는 신기루 같은 행사로 금빛 축음기 모양의 트로피는 음악성과 상업성을 영원히 담보하는 무한대의 우량주다. 그런데 이 시상식에 늘 따라붙는 수식어가 있다. ‘보수적인 그래미 어워즈’. 자유롭고 개방적인 미국 음악계를 총결산하는 그래미를 왜? 음악 평론가나 전문가들도 라디오나 텔레비전에서 보수적이라고만 얘기하지, 그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는 사람은 없다. 세계 최고의 대중음악 시상식이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알면 방탄소년단이 왜 그래
소설가 친구와 얘기하다가 그가 을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니, 너 오 헨리(O. Henry) 단편집 안 읽었어? 소설을 쓴다는 사람이 말이야 오 헨리를 안 읽다니? 나는 당장 줄거리 설명을 시작했다. 시시한 악당 두 명이 아이를 유괴하려고 계획해. 부모에게서 크게 한탕 뜯어내서 손 씻고 싶다는 거였지. 그런데 당연하지만, 일이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 거야. 걔네가 유괴한 아이가 정말 말을 안 듣거든……. 물론 오 헨리 소설을 읽지 않아도 소설가 생활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독자 생활에도 마찬가지다. 솔직히
영화 은 못생겼다는 이유로 핍박당하고 소외당한 여인의 이야기를 펼쳐 보인다. 우스꽝스럽게도, 또는 처참하게도, 안 그래도 늘 천덕꾸러기 취급 받는 ‘똥걸레’ 그녀가 더 깊은 구렁텅이로 밀어 넣어지는 이유는 그녀가 피복 공장의 지배자이자 부조리한 권력에 저항했기 때문이다. 이때 그녀를 핍박하는 데 앞장서는 이들은 다름 아닌 그녀와 가장 가까운 이들이다. 심지어 가족이다. “왜 가만히 있지를 않는?!” 모종의 결정적인 순간, 그녀가 듣게 되는 세상의 마지막 외침이다. 그건 “나처럼 복종해!”라는 뜻이다. 못난 자가 순순하지도 않
김애란의 (문학동네, 2025) 읽기 김애란의 ‘안녕이라 그랬어’는 동명의 소설집(문학동네, 2025)에 실린 단편이다. 꼭 20년 전에 작가의 첫 소설집 (창비, 2005)가 세상에 나왔다. 가진 것 없는, 하지만 선량한 청년들의 입사식(入社式)을 다감하게 그려내던 작가의 시선이 한층 더 넓고 깊어졌다. 이 소설의 주인공 ‘나’는 40대 중반, 경력이 단절된 여성이다. 삶은 청년에게도, 중년에게도 호락호락하지 않다. 인생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으며, 아름답던 시절은 희미한 기억으로만 남는다. 소설
애플TV가 지난 8월 말에 공개한 는 보면서도 믿기 힘든 프로그램이다. K팝 가수들과 협업을 이룬 아티스트들이 우리의 심장박동수를 끌어올릴 정도로 그 명성이 높기 때문이다. 아마 다수의 젊은 세대와 팝 음악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이 해외 가수들이 얼마나 유명한지 감이 안 잡히겠지만 그들은 팝 역사에 진하게 기록된 인물들이다. 이 글은 이번 프로젝트에 참여한 주요 팝스타들에 대한 가벼운 가이드다. 에이티즈, 컬럼비아의 라틴 팝 가수 제이 발빈(J Balvin)과 함께 한 카일리 미노그(Kylie Minogue)는 1
이산화, 만약 인간의 공격성이 비활성화될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떨까? 원래는 안전한 상태에선 비활성화됐어야 하는데 어떤 연유로 스위치를 끄는 방법을 잊어버린 거라면, 그런데 스위치에 해당하는 특정 수용체를 자극할 방법을 찾는다면? 사람들의 공격성을 죄다 비활성화시켜서 순식간에 세계평화를 달성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잘 지내던 사람을 갑자기 화낼 줄도 모르는 무방비한 성격으로 조작하는 행동은 좀 꺼림칙하기도 하다. 모든 사람에게 화학적 거세를 시키는 것과 근본적으로 유사해 보이기도 하다. 이는 이산화의
8월 22일 개봉한 일본 애니메이션 은 개봉 전 예매로만 90만 장의 표가 팔려나갔다. 개봉 첫 주말 164만 명의 관객을 불러 모았다. 올해 개봉한 영화들 최고의 오프닝 성적이었다. 시리즈부터 극장판까지 젊은 관객들의 충성도가 강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나도 개봉일에 극장에 가서 이 영화를 봤는데, 예상대로 관객 대다수가 20대 젊은이들이었다. 시리즈와는 달리 극장판은 15세 이상 관람가여서 주말에는 10대 관객들도 대거 몰렸을 것이다. 지인은 내게 “딸이 고2 학생인데 이 영화를 2D로 보고 아이맥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는 SF를 사고실험의 장르라는 의미에서 사변적 우화(Speculative Fabulation, 이하 SF)라 불렀다. 그렇다면 정보라의 SF는 고통, 두려움 등의 정동이 새로운 상상력을 관통하는 이른바 ‘정동적 SF’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의 표제작 ‘저주토끼’는 정동적 반복이 만들어내는 서사의 사이클을 명증하게 보여준다. ‘나’의 할아버지는 저주 용품을 만드는 장인이다. 어느 날, 할아버지의 친구가 부도덕한 경쟁 회사의 음모로 인해 몰락하게 된다. 할아버지는 “개인적인 감정으로
뮤지컬에서 노년을 다루는 작품들은 손에 꼽을 정도이다. 노년은 가족과 용서라는 구성과 연결될 확률이 높고, 희망적인 메시지를 바라는 장르적 문법을 맞추는데 많은 공력이 따르기 때문이다. 노인 인구의 70%가 겪는다는 치매는 퇴행 방식으로 인해 타자의 부정적인 시선을 받기 때문에 어려운 소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5년 공연예술 창작산실 올해의 신작 부분에서 선정된 뮤지컬 (오미영 작·연출, 노선락 작곡, 더줌아트센터, 2월 1일~6월 1일)이 다루는 노인은 신선하다. 이는 극단 오징어의 노선 즉 20년
최근에 내한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친 록 그룹 콜드플레이는 ‘Viva La Vida’라는 곡으로 유명하다. 라디오헤드 풍의 슬픈 팝 록을 들려주던 콜드플레이가 기존 스타일을 버리고 프로그레시브 장르에 도전해 이미지 변신은 물론 제2의 전성기를 시작하게 도왔다. 매너리즘의 굴레에서 그룹을 구해낸 일등 공신은 프로듀서 브라이언 이노였다. 그는 세계적 인기를 누리던 콜드플레이의 콧대를 누르고 전면적 변신을 강변할 수 있는 대선배였다. 그는 토킹 헤즈, 유투 같은 밴드들을 이끌고 명반을 만들어낸 전설이었다. 콜드플레이는 창의적 갈등을 겪긴
이번 타이거쌀롱에서 소개할 현대 한국 소설의 중요한 장면은 한강의 (창비, 2014)에서 골랐다. 는 2024년에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며 다시 조명받은 작품이기도 한데, 이 가운데 한 부분을 같이 읽어보려고 한다. 는 1980년 광주 5·18항쟁을 다룬 장편소설이다. 1장의 주인공 소년 동호(‘너’)는 도청에서 악취를 풍기며 썩어가는 무수한 주검들과 마주한다. 동호가 하는 일은 그 시신들을 염하는 일이다. 동호는 시취(屍臭)를 줄이기 위해 켜 놓은 “촛불 하나하나가 고요한 눈동자
생존이라는 과제를 늘 안고 사는 인간에게 의학은 일상의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다. 그런 이유로 의학을 다룬 드라마도 지속적으로 제작되었고 꽤 많은 의학 드라마가 대중에게 사랑을 받았다. 최근 공개되자마자 짧은 기간 화제성을 모은 OTT 드라마 (넷플릭스)나 (tvN)을 이은 (tvN)은 현재 진행 중이다. 의학 드라마에서 의사는 환자의 생명을 다루며 자신의 선택이나 행동에 윤리적 책임을 부여받는 인물로 재현된다. 의학 드라마는 생명과 관련된 절박한 상황을 설정하고, 의
2025년 봄, 뮤지컬 창작진들의 신선한 시도들이 진행 중이다. 뮤지컬 (한정석 작, 이선영 곡, 박소영 연출, 3월 14일~5월 18일 두산아트센터 연강홀)는 2021년 창작산실 대본 공모 사업에 당선된 후 완성한 작품이다. 무대 위에는 강아지, 식물, 우주인과 같은 ‘존재’ 혹은 비인간 생명체들이 가득하다. 이 작품은 SF적 상상력에 동물의 권리, 미래 위기까지 담아내 뮤지컬이 가볍다는 통념을 뛰어넘는 행보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야기는 1957년 소련의 스푸트니크 2호선에 태워진 우주 탐사견 라이카와 소
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음악 동호회의 주류 장르는 록이었다. 힙합, 일렉트로닉을 좋아하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그들만의 리그 대우를 받았다. 신촌과 홍대 앞에 그렇게나 많았던 음악 바들도 도어스, 벨벳 언더그라운드, 큐어 같은 록 밴드 이름을 간판으로 내걸고 있었다. 전문적인 취미의 교양서 역할을 했던 잡지를 기준으로 하더라도 핫뮤직, 서브 같은 주요 매거진들이 록 중심이었다. 한국만 그랬던 것도 아니다. 롤링 스톤, NME 같은 미국과 영국을 대표하는 양대 음악 잡지들이 전부 록 중심이었다. 그때의 마니아들이 록이라는 악마에 씌어
2회에 걸쳐 한국 현대소설을 두 편 소개하려고 한다. 첫 장면은 이미상 작가의 단편소설에서 찾았다. 이미상 작가는 2018년 웹진 ‘비유’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소설집 (2022)을 출간했다. 첫 단편집을 출간한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이미상 스타일’이라는 표현이 통용될 정도로 개성적인 작품세계를 선보이는 작가다. 이미상의 단편 ‘모래 고모와 목경과 무경의 모험’(, 문학동네, 2022)으로 가보자. 이 소설을 다루려고 하는 이유는 두 가지 특징 때문이다. 하나는 이 소설이 전통적인 소설
OTT 드라마 (넷플릭스)는 의 이나은 작가와 , 를 연출했던 오충환 PD의 작품이다. 전작에서 청춘의 꿈과 사랑을 다뤘다는 공통점을 가진 작가와 연출가의 만남은 공개 전부터 대중을 설레게 했다. 는 관심과 기대만큼 아직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키고 있진 않지만, 드라마에서 담아냈던 청춘의 이야기처럼 담담하고 조용히 우리 일상에 스며들고 있다. 누군가에겐 평범한 일상이 어려울 때가 있다. 매일 들어가던 집이 두려워질 때, 반복되던 생활에 균열이 오기 시작하는 때가 있다.
매해 초 창작산실 작품은 최신의 관심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주목받는다. 2025년 17회 창작산실 선정작 중 (김은희 원작, 현지은 작, 원요한 곡, 이수인 연출, 1월 21일~3월 2일, 인터파크 서경스퀘어 스콘2관)에는 레트로 감성이 가득하다. 이야기는 농활 간 대학생 석영(홍승안, 안지환 분)이 도서관 사서 정인(허혜진, 홍나현 분)과 사랑에 빠졌지만, 시대적 한계(연좌제, 삼선개헌)로 헤어지고 그리워하는 것으로 정리된다. 문제는 관객들이 ‘시대적 한계로 이루어지지 않는’ 부분보다 ‘각자 그리워하는 엔딩’에서 반응한
‘쿵쿵쿵쿵.’ 드럼 세트의 중앙 하단 큰 북을 뜻하는 베이스 드럼을 한 마디에 네 번 꽂는 소리. 클럽에 가면 가장 많이 들을 수 있는 소리다. 하우스 같은 클럽 댄스의 터줏대감 장르가 이 비트를 쓴다. 세계적으로도 한국에서도 클럽 음악의 대다수는 저 비트를 기반으로 만들어진다. 클럽 음악에 대한 편견 때문인지 하우스 비트는 주류 음악에 쓰이는 일이 많지 않다. 빌보드 초대형 히트곡 중에도 사례가 있긴 하지만 ‘강남스타일’처럼 애초에 클럽 분위기를 내려고 의도한 곡들이 대다수다. 똑같이 흑인들의 하위 문화에서 시작했음에도 힙합이 주